히딩크가 입을 열었다. 한국축구의 발전을 위해 무슨 역할이든 하고 싶다고. 하겠다고.
히딩크 감독에게 묻고 싶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과 여론 분열, 대립을 알고 있느냐고. 그 대립과 혼란이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한 과정이냐고 말이다. 히딩크가 감독인데, 더 좋은 감독이 있으니 물러나라고 하면 히딩크는 수긍할까? 수긍한다 해도 그래서는 안 된다. 히딩크 아니라 다른 어떤 감독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바꾸면 나아질 가능성보다는 계약에 대한 신뢰가 우선이다. 한 나라의 국가대표팀 감독은 특별한 이유 없이 두달만에 확 갈아치워 버릴 수 있는 자리인가? 1년 계약을 했으면서 두 달만에 계약을 해지한다는 건 법적으로도 문제가 된다.
사람들은 청와대에 민원을 제기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진짜 큰 문제다. 만약에, 진짜 만약에, 청와대 측이 그 민원에 대해 언론에 한 마디라도 언급하기만 하면 FIFA 의 조사 대상 사안이 된다. FIFA는 각국 정부가 축구에 개입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1월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이 쿠웨이트에게 3대0 몰수게임 승을 거둔 것을 잊었나? 쿠웨이트 정부가 체육계에 개입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꾼 것만으로도 FIFA는 그런 결정을 내렸다. 정부가 개입한 것이 아니라, 개입할 수 있도록 한 법 조항만으로도 말이다. 지금 청와대에 민원을 내는 자들은 자신이 한국축구팀에게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 행위를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런 자들이 축구팬이라고 할 수 있을까?
히딩크의 기자회견도 문제다. 현실적으로는 감독을 맡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지금으로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라면서 여운을 남긴다. 히딩크도 감독을 했던 사람이고, 잘려 본 사람이다. 히딩크 본인이 감독을 맡고 있는데 협회에서 다른 감독에게 의견을 묻고, 그 감독이 뭐든지 하겠다고 말한다면 히딩크는 아, 그래요? 그럼 제가 물러나야죠. 하면서 수긍할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라는 말은 언제 어디서든지 귀담아 들을 만하다.
과거의 영광? 중요한 건 최근 성적이 아닐까? 히딩크는 최근 FIFA 주관 대회에서 자신이 맡은 팀을 예선탈락시킨 감독이고, 신태용은 최근 FIFA 주관 대회에서 두 번 다 팀을 조별예선 1위로 16강에 진출시킨 감독이다. 그것으로 부족한가? 그렇다면 3년 전으로 거슬러 가 기억을 더듬어 보자. 2014년 가을에, 브라질 월드컵에서 졸전을 거듭하다 탈락하고 온 대표팀을 추슬러 베네주엘라와 우루과이를 상대로 시원한 경기를 보여준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신태용이다.
감독도 아니고 감독대행도 아닌, 감독 없는 팀의 수석코치로 국가대표팀을 이끌면서 보여준 모습이었다. 지금 난리치는 사람들은 그걸 3년만에 잊은 모양이다. 아니, 3년 전의 그 경기를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틀림없다. 신태용이 대표팀에서 어떤 경기를 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시끄럽게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축구팬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 그들은 내년 여름이 지나면 또 조용하다가 4년 후에 또 나타나서 떠들어댈 사람들이다. 월드컵 때에만 축구를 보는 사람들이다. 최근에 치른 최종예선 두 경기만 보고 신태용 축구는 재미 없고 약하다고 결론내버리는 사람들이 과연 축구팬일까?
2016 유로에서 예선탈락하는 등 침체를 겪고 있는 네덜란드 대표팀의 상황을 이렇게 만든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거스 히딩크다. 네덜란드에서 실패했으니 감독으로 부족하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히딩크보다 신태용이 좋은 감독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히딩크가 기자회견에서 말한 대로, "이번 월드컵에서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실패한다고 해서 나쁜 게 아니고 실패해도 일어나면 다음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번 월드컵이 지구멸망 전 마지막 대회도 아니고, 조별예선에서 탈락한다고 해서 한국축구가 망하는 것도 아니다. 대회 때마다 맨날 하던 조별예선 탈락, 이번에 한번 더 한다고 뭐 달라지겠는가? 2014 브라질에서 보았던 참담한 실패보다 더 참담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 인터넷 뉴스의 댓글을 보면 히딩크가 맡아서 실패하는 건 괜찮고, 신태용이 맡아서 실패하는 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아니, 신태용은 반드시 실패하고, 히딩크는 실패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정치뉴스 댓글에서 보던 광신도 행태가 스포츠뉴스 댓글에서도 보인다. 하긴,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광신도들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근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 근거는 없이 자신들이 그렇게 믿을 뿐이니까.
만약에 신태용 감독이 러시아에 가서 조별예선 탈락한다면 그것 보라며 비난을 퍼부을 사람들이다. 16 강에 올라도 경기내용이 어쩌고 선수기용이 어쩌고 하며 비난할 인간들이다. 한국이 언제부터 월드컵 16강에 가는 게 당연한 팀이었다고. 언제부터 경기내용과 승리를 만족스럽게 챙기는 팀이었다고. 또, 16강에, 8강에 진출한다 해도 신태용이 아니라 히딩크였다면 8강, 4강에 갔을 거라고. 아니, 우승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사람들이다.
생각 없이 비아냥대듯 내뱉은 그런 자들의 말을 여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개구리가 보이면 조건반사적으로 돌을 던지는 자들이다. 습관적으로 돌을 던지면서도 잘못인 줄 모르고, 돌을 던지고도 다음날이면 자기가 어디에 돌을 던졌는지조차, 아니, 돌을 던졌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사람들이다. 그런 자들의 말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냄비는 식게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이고, 결국은 식게 되어 있다. 어쩌면 그래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달아올랐던 이 냄비들은 며칠 지나면 또 식을 테니까.
할 일 없는 자들이 끝없이 물고 늘어지는 이 논란이 하루빨리 가라앉기를 바란다. 그리고, 신태용감독이 이번 논란으로 많이 상처받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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