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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이야기

하메스를 묶은 고요한, 그리고 김남일과 최성용의 추억

콜롬비아를 상대로 치른 평가전, 보셨습니까? 저는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결과적으로 2대1로 이겼기 때문에 재미있었던 게 아닙니다. 경기 시작하자마자 이근호 선수가 오른쪽 라인을 치고 달릴 때부터 오늘 할 만하겠다 생각했고, 콜롬비아의 핵심 선수라고 할 수 있는 하메스 선수가 고요한 선수의 밀착 수비에 짜증스런 반응을 보일 때 승리를 예감했습니다.  전후반 내내 우리나라 대표팀이 주도권을 잡고 지배하는 경기, 정말 오랜만에 보지 않았습니까?


콜롬비아의 하메스를 수비하고 있는 고요한 선수


상대팀 미드필드의 핵심 선수를 묶어라... 축구경기에서 상대팀의 플레이메이커를 잘 막으면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지 않는 거겠죠. 상대팀에게 찬스를 허용할 상황을 만들지 않게 되니까요. 그동안 세계적인 수준으로 보면 약체일 수밖에 없는 한국축구가 세계적인 팀과 맞설 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작전이었습니다.


현대축구가 공간과 점유율을 강조하면서, 또 3백이 아니라 4백이 대세로 굳어지면서 한국축구는 큰 변화를 맞았죠. 스위퍼와 스토퍼라는 용어로 대변되는 3백의 대인방어... 사람이 아니라 공간을 막는 4백의 지역방어가 답이라는걸 알면서도 선수들이 4백 전술을 금새 습득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2002년까지는 3백을 써야만 했던  한국축구였습니다. 그러나, 악착같은 대인방어로 대변되는 한국의 수비는, 기억에 남는 장면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먼저 무려 30년 전,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팀은 당시 세계 최고의 선수였던, 아니, 거의 유일한 수퍼스타였던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와 만나게 됩니다. 그 경기에서 당시 허정무 선수가 마라도나를 전담 마크하게 되었죠. 경기 후, 세계의 통신사들은 경기 결과를 알린 후, 한국의 태권 수비라는 제목의 가십 토픽으로, 또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보도했습니다. 경기에 지기는 했지만 마라도나를 끈질기게 괴롭힌 허정무 선수의 수비는 인상적이었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한국-아르헨티나 경기장면, 허정무가 볼을 걷어내면서 마라도나와 충돌하고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후, U-20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한국팀은 일본과 만나게 됩니다. 당시  U-20 팀은 최용수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와 윤정환이라는 중원 사령관이 이끌던 시절입니다. 일본은 마에조라는 게임메이커를 앞세워 유럽식 축구를 한다고 내세웠고, 가와구치라는 골키퍼가 있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두 팀 모두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상황이었지만 한일전은 자존심 대결이죠. 월드컵에서 한국이 이기는 것만큼 기분좋은 게 있다면 일본이 지는 거 아닐까요? 


윤정환의 프리킥이 가와구치의 손이 닿지 않는 골대 모서리로 빨려들어가면서 앞서 나간 우리나라는 2대1로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 경기에서 마에조를 꽉 틀어막은 최성용이 스타로 떠오르게 되었는데요. 일본 공격의 시발점이자, 일본 공격의 전부였던 마에조노를 밀착 수비하면서 경기 내내 이렇다 할 위기를 허용하지 않은 최성용은 제 개인적으로 그 경기의 MOM 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잘 아시다시피 너무나도 유명한, 한국축구의 역사적 사건이었던 2002년에도 비슷한 경기가 있었습니다.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만난 한국과 포르투갈.  그 경기  결과는 아시는 것처럼 박지성 선수의 골로 1대 0, 한국이 이겼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에는 세계 4대 미드필더 중 하나였던 피구 선수가 있었습니다. 피구 선수는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하고 중간에 교체되어 나갔고, 나가기 전까지 김남일 선수에게 꽁꽁 묶였습니다. 김남일을 피해 왼쪽으로 가면 송종국 선수가 그림자처럼 붙어다녔고, 오른쪽으로 가면 이영표 선수가 볼 잡을 틈을 주지 않았죠.


어제 경기에서는 고요한 선수가 허정무-최성용-김남일의 뒤를 이어 상대팀 에이스를 틀어막았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하메스를 고요하게 만들었는데, 하메스가 그나마 반짝 활약을 보인 건 프리킥 상황일 때 뿐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짜증을 내다가 너무나 티가 나는 헐리우드 액션으로 얼굴을 싸쥐고 뒹굴었죠. 가슴을 밀쳤을 때 얼굴이 아픈 건 보기 드문 증상인데, 그런 희귀병 환자는 건강을 위해서라도 축구를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요?


어제는 이긴 것도 이긴 거지만, 오랜만에 시원한 경기를 보여 주었고, 한국축구의 인상적이었던 경기들을 다시 생각나게 해 주었던, 아주 재미있는 경기였습니다. 14일 평가전도 잘 치르고, 내년 월드컵까지 부상 없이 승승장구하길 기원해 봅니다.